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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체국과 사람들 7월호 '사람들이야기'편 촬영

작성자 두레촌(ip:)

작성일 2018-07-04

조회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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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조청, 엿 분야 전통식품명인 제32호 강봉석대표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조청 제조기법을 표준화하여 건강한 단맛, 정직한 단맛을 추구하는 조청의 명가 두레촌에서 강봉석 명인을 만났다. 이른 아침부터 직접 배달을 다녀왔다는 그는 희끗희끗한 머리와 깊은 주름이 무색할 정도로 기운이 넘쳐 보였다. 강 명인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바쁘게 산다”, “잔소리를 많이 해서 직원들이 미워한다”며 너스레로 분위기를 띄우더니 이내 70여 년의 인생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 놓기 시작했다.
글. 김희란 + 사진. 박성희


두레촌의 건강한 단맛, 집념이란 이름으로 전통을 이어가다 
조청의 명가 두레촌, 고유의 맛을 추구하다


곡식을 엿기름으로 삭히고 조려 꿀처럼 만든 조청은 우리나라고유의 전통 감미료라 할 수 있다. 조청은 설탕과 다른 자연의 단맛과 고유의 향을 지니고 있어 구수하고 부드러운 감칠맛을 자랑한다. 전통적인 제조공정으로 옛맛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두레촌은 4대를 이어온 조청 명가의 자부심으로 건강한 단맛을 위한 연구와 이론화 작업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강봉석 명인의 뒤를 이어 아들 강철 씨가 가업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명인조청가루’ 제품을 선보이며 중국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두레촌이 조청의 명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강봉석 명인이 존재한다. 그와 엿의 인연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엿 고는 냄새를 맡으며 자란 강 명인은 어린 시절을 또렷이기억한다.

명인의 할아버지는 가마솥에 엿을 고았고 아버지는 장날에 엿을 내다 팔거나 어물전을 하는 친구를 따라 포천에서 가까운 황해도로 엿을 팔러 나갔다.

아버지가 장사를 나가면 어린 명인은 늘 할아버지와 시간을 보냈다. 엿을 골 때면 손자인 명인의 입에 귀한 조청을 한가득 떠 넣어 주었고, 명인은 입속을 꽉 채우며 퍼지는 조청의 단맛과 향이 그저 좋았다.




 


“내 나이가 대여섯 정도 되었나? 항상 커다란 가마솥 옆에 앉아 할아버지가 엿 만드는 과정을 지켜봤어. 할아버지는 엿을 만들면서 맛나다며 내 입에 떠 넣어 주시곤 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

그때 ‘조청 맛이란 이런 것’이라는 걸 정확히 배운 거라.”
단맛을 좋아할 때이기도 했고, 귀한 조청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마냥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명인은 그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전통 엿 맛’을 할아버지께 전수받았음을 깨달았다.

그 맛이야말로 조청의 맛이자 건강한 단맛, 할아버지의 향수 젖은 맛이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때의 엿 맛이 머릿속에 생생하다는 강봉석 명인은 할아버지가 알려준 그 맛을 떠올리며 두레촌만의 맛과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일본 청년과의 대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포천에서 엿을 만들어 팔던 명인의 가족은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고 충주에 터를 잡았다.

명인은 초등학생 때부터 엿을 만드는 아버지를 도와드렸는데 그 일이 얼마나 고되던지 ‘아주 고역이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엿을 고아야 하기에 산에서 나무를 하러 다니며, 철길에 떨어진 숯을 주어 땔감을 마련해야 했지. 조청이 눌어붙지 않게 밤새 저어야 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질려버린 거라.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직장을 구해 돈을 벌기로 했지.”
당시 명인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도와 대를 이어야 한다는 것보다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고등학교 졸업 후 명인은 광업회사에 취직하게 된다. 겨울철에만 한시적으로 엿을 만들었던 터라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부친을 도와야 했지만 그 생활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인의 인생에 변화를 준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명인이 직장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기술 발전을 위해 회사에서는 일본 기술진을 영입했고, 그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강 명인은 일본 기술진 중 20대 후반 청년의 출퇴근을 안내해주는 업무를 부여받았다. “6개월 동안 일본 청년과 함께 다녔지. 그때 내가 일본어를 배워야겠다 싶어서 학원에 다녔고, 그 덕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 그 청년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준 친구야. 직장 생활을 접고 가업을 이어가야겠다는 동기를 그 놈이 준 거라.”
일본 청년은 직장을 그만두고 칼 만드는 가업을 잇기 위해 일본으로 귀국한다고 통보했다. 명인은 그의 결정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동안 쌓아온 4년의 경력을 모두 버리고 우리나라의 대장간과 같은, 힘들고 수입도 안 되는 일에 뛰어든다는 것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명인에게 일본 청년은 “가업을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명인은 청년의 말에서 진중함을 느꼈다. ‘일본의 전통이란 무엇이기에 이리도 가업을 중시하는걸까?’ 호기심을 품은 명인은 가업과 전통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결국, 일본 청년의 결심은 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할아버지에게 배운 것, 아버지가 만드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자랐던 나도 이제 돌아가 가업을 이어야겠다’고 명인은 결심했다.
“엿에 회의를 느끼다 일본 청년을 만나 이것이 아니라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전환점을 맞게 된 거야.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오자마자 충주 시청으로 가서 허가를 내달라고 했어. 정식으로 허가를 내고 나니 집념이란 것이 생기더라고. 단지 엿을 만들어 파는 것에서 벗어나 전통을 이어가야겠다고 생각이 바뀐 거지.”
본격적으로 가업에 뛰어든 명인은 무엇이든 열심히 임했다. 엿을 팔기 위해서는 손수레를 끌고 시장이나 농촌으로 다녀야 했는데, 그는 기존 판매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마을 구멍가게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누가 엿을 사 먹느냐며 거절했으나 강 명인의 집요함에 결국 가게 주인은 승낙했다. 차로 50분 걸리는 곳에 자전거로 배달도 하고, 각 도청을 다니며 부녀회장을 만나 엿의 효능과 전통을 알리며 판매했다. 또 관광지마다엿을 납품하기도 했는데, 판매처에 엿을 납품하지 못할 정도로 히트를 쳤다.

당시만 해도 충주에는 큰 규모의 엿 공장이 4곳이나 있었는데 3년 만에 모두 문을 닫았고, 강 명인이 운영하는 두레촌만이 자리를 지켰다. 누구보다 먼저 발 벗고 나서 새로운 판매 방식을 찾고자 노력했기에 거둔 성과였으리라.


전통을 향한 집념으로 명인의 자리에 오르다.


강 명인은 ‘집념’이 있었기에 명인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집념 앞에는 모든 것이 무너지지. 나는 운도 좋았지만 전통을 지키고 이어가야겠다는 집념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 같아. 내가 일흔일곱의 나이치곤 건강한 편이야. 오직 집념으로 한길을 걸어온 것이 나의 건강을 지켜준 게 아닐까 생각해.”
그는 막상 명인이 되고 보니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명인’이란 타이틀은 잘 먹고 잘살라고 주는 것이 아니며,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명인’이라 불러 주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강조하는 강 명인. 그가 말하는 ‘명인’은 일상생활에서 모범이 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조상으로부터 전수받은 비법을 혼자만 움켜쥐고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계승하고 발전시켜 보급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명인들은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그 맥을 이어나가야 해. 나라에서 명인이란 칭호를 준 만큼의 역할은 해야 하잖아. 모두가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이어가야 하는 거라. 전통의 뿌리가 잘 박혀 있으면 절대 흔들리지 않아.” 강 명인은 수천 년 이어온 조청을 지키고 소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청을 오랫동안 애용한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특히 먹었을 때 은은하게 퍼지는 향과 건강한 단맛은 설탕에서 절대 맛볼 수 없는 것이라고. 설탕을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쌀과 보리에 싹을 키워서 만든 엿기름이기에 건강함이 배가되는 조청을 잊지 않고 찾아주길 바란다는 명인의 뜻이다.

전통을 이어가는 두레촌은 강봉석 명인과 그의 가족, 직원들의 인내와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있었다. 강봉석 명인은 특히 ‘식구(아내)의 특별한 미각’이 큰 보탬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의 두레촌으로 자리 잡기까지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고생한 아내를 향해 미안한 마음도 잊지 않고 전했다.
지난날의 추억을 회상하던 명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는 두레촌이 명성을 거머쥐던 시절, 우체국과 함께한 그 당시를 떠올렸다. “2~30년 전 이야기지. 우체국쇼핑에서 판매를 시작하며 우리 제품이 어마어마하게 나갔어. 그때는 지금처럼 전문적인 시스템이 아녀서 늦게까지 수고하는 직원들이 너무 고마워 떡도 해다 주곤 했어.

두레촌이 여기까지 온 건 우체국쇼핑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과거에는 우체국쇼핑의 도움을 받아 규모를 키운 기업이 여러 군데 될 거야. 옛날 생각하면 지금도 고맙고 그리운 점이 많아. 앞으로도 우체국쇼핑이 우리나라 영세한 업자들을 계속 도와주고 지원하겠지.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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